<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1장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노자> 제1장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진짜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한송 강해>
늙은이는 도(道)라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하면서 "'도'(道)를 '도'라고 말하면 그러한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도라고 이름 붙이면 그건 이미 도가 아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형체가 있어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도는 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고 했던가?!
옛날에 초(楚)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다가 잘못하여 칼이 물속에 빠지자, 그 뱃전에 표를 하였다가 배가 나루에 닿은 뒤에 표를 해놓은 뱃전 밑의 물속에 다시 들어가 칼을 찾는다는 고사(故事)다.
그렇다. 뱃전에 '도'라고 표시해 놓으면 이미 땅 밑에 '도'는 배의 '도'와 멀리 떨어져 버려 표시한 '도'에는 '도'가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는 것은 뱃전에 표시하고 그곳에서 '도'를 찾으려는 것과 같다. '도'는 이렇다 저렇다 말로써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는 안다 모른다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 뭐라고 표현해야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런 차원에 속한 게 아니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또한 같은 맥락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 긍정이 있을 때, 그러니까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이름은 항상 그 이름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긍정에 대한 부정으로 얘기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무엇'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붙이는 데 그 이름이 곧 그 '무엇'은 아니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어떤 것을 제한하는 것이니까.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굳어져 버린 이름이 아닐 때만 항상 그러한 이름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정우열' 하면 '정우열'이란 이름으로 나를 인식한다. 안경 쓰고 수염 기른 사람! 그러나 '정우열은 당장 수염을 깎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정우열'이란 이름은 나의 본질이 아닌 그들의 관념이다.
바로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다. "도를 도라고 말한다"라는 것은 곧 시시각각 변하지 않을 수 없는 도를 변하지 않는 우리의 생각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 속에 집어넣어져 버린 도(道可道)는 항상 그러한 실제의 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사랑이 아니다.".
늙은이는 이름 지어지지 않은 것[無名]과 이름 지어진 것[有名]을 나누어 '천지의 비롯됨'[天地之始], '만물의 어머니'[萬物之母]라고 했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천지'(天地)는 전체요, '만물'(萬物)은 부분이다. 전체 속에 부분이 있고,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 천지는 '공'(空)이요, 만물은 '색'(色)이다.
누가 조주(趙州) 스님께 묻기를 "스님,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였다. 스님이 대답하기를, "없지" 하셨다. 그 뒤 어느 다른 스님이 또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있지"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옆에서 듣고 있던 시봉이 '있다' '없다' 그 말에 그만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스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는 사실 '있다' '없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있다' '없다'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인걸.
'있다' '없다'가 따로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있다' '없다'라는 '유'(有) '무'(無)의 안경에 따라 달리 보일 수밖에.
이것을 늙은이는 "상무욕이관기묘(常無欲以觀其妙)하고 상유욕이 관기요(常有欲以觀其徼"라고 했다.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라는 말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욕심 없음'[無欲]을 '빔'[空], '욕심 있음'[有欲]을 '빛'[色]으로, '묘함'[其妙]을 '지혜'[般若], '가장자리'[其徼]를 현상계인 '차별상'(差別相)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차별상을 통해 그 모든 차별상 안에 반야, 즉 도(道)가 있음을 보는 것, 말하자면 빛[色]을 통해 빔[空]의 세계를 보는 것을 '법안'(法眼)이라 하였으며, 차별이 없는 세계[妙], 다시 말해 빔[空]의 세계에서 모든 빛[色]이 하나임을 보는 것을 '지안'[智眼]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빔[空]과 빛[色]이 하나, 즉 빔이 빛[空卽是色]이고, 빛이 빔[色卽是空]이라고 보는 것을 '불안'(佛眼)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보려고 하는 마음[意圖]이 있어서 보면 껍데기 차별상인 현상계를 보고[常有欲以觀其徼], 보려는 마음이 없이 보면 놀라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러니까 빔[空]의 세계, 없음[無]의 세계를 본다[常無欲以觀其妙].
하지만, 이 둘은 같은 것인데 겉으로 나타남에 그 이름이 다르다[此兩者同, 出而異名].
이처럼 불안(佛眼)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같은 것이다. 이를 늙은이는 '가물'[玄]이라 했다.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의 차별이 없어지니까 주(主)와 객(客)이 따로 없는, 그런 세계다. 나오기 전에는 하나인데 나옴으로써 그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出而異名]. 이는 가물가물하고 또 가물가물해서 뭇 오묘한 것들[衆妙]이 나오고 들어가는 문이 된다.
신비하고 오묘한 세계는 정형(定型)된 세계가 아니다. 가물가물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하여 내용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모든 오묘함이 다 나온다. 요술 단지처럼! 참으로 신비할지어다. 그럼, 이쯤에서 어느 선사(禪師)의 게송(偈頌)을 한 수(首) 읊어 보자!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욕지불거처(欲知佛居處)
어묵동정지(語默動靜止)
밤마다 부처 품고 잠에 들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나네.
부처님 어디 계시는지 알려거든,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행동 하거나 행동하지 않거나 바로 그 자리를 보시게!
<한송 게송>
도를 도라 하면 그건 진짜
도가 아닙니다
한 송
도를 도라고 하면
그건 진짜 도가 아닙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건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 합니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앎에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입니다.
그걸 일컬어
가물 타고 합니다.
가물고 가물가물한 것
그건,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2006. 4.1
<노자> 제1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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