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5장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
<노자> 제5장
만물을 풀강아지 처럼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읽기>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여 이만물(以萬物)로 위추구(爲芻狗)하니라.
성인(聖人)은 불인(不仁)하여 이백성(以百姓)으로 위추구(爲芻狗)니라.
천지지간(天地之間)은 기유탁약호(其猶橐籥乎)인저 허이불굴(虛而不屈)하고, 동이유출(動而流出)이라.
다언삭궁(多言數窮)하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
<풀이>
하늘과 땅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만물을 풀강아지 처럼 여긴다. 성인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속이 텅 비어 있으면서 쭈그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뿜는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한송 강해>
天地不仁(천지불인), 여기서 '仁'(인)은 사적인 감정으로 애정(愛情)을 말한다. 원래 이 '仁'은 공자(孔子)의 주체사상으로 유가(儒家)를 상징하는 개념어(槪念語)이다. 그런데 늙은이는 '不仁'(불인)이라 하여 '仁'(인)에 대한 반어(反語)로 사용했다. 그러니까 "인(仁)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그렇다는 말인가? 천지(天地), 하늘과 땅이 그렇단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인정(仁情)머리가 없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다. 하늘과 땅이 인정머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는데 가려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편애라고 할까, 아니면 마음이 끌리는 애착이랄까 하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만물을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대한다는 말이다.
천지는 인간이 바라는 기대나 희망이나 믿음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그러한 생명체다. 천지에게 무엇인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에서 보면 천지는 야속하고 잔인한 대상이다.
Heaven and Earth are ruthless! 천지는 잔인하다!
천지는 잔인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그래서 함이 없고, 조작함이 없다. 그래서 만물은 스스로 다스리며 질서를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를 인자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인자하게 되면 반드시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고 하는 따위의 장난이 개입된다. 그리고 은혜를 베푼다고 함이 생기고 함이 있게 된다.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면 사물은 본래의 진실한 모습을 잃어버린다. 은혜를 베풀고 함이 있게 되면 사물은 온전하게 존속 할 수가 없다. 사물이 온전하게 존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천지가 만물을 온전하게 생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天地)는 만물로 풀강아지를 삼는다 [以萬物爲芻狗]라 한 것이다. 여기서 '以A 爲B' 는 'A를 가지고 써 B를 삼는다'라는 뜻이다. 즉 영어로 말하면 "to regard A as B"가 된다. 그럼, '芻狗'(추구)란 무엇인가? '芻'(추)에는 '꼴 추', '짚 추'의 뜻이 있다. 꼴이란 말이나 소의 먹이로 사용하는 풀을 말하고, 짚이란 벼의 이삭을 털어낸 줄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芻狗'(추구)란 풀이나 짚 따위로 만든 개 모양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옛날에 이 추구(芻狗)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내다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내가 어렸을 때 보면 정월 십사일 저녁때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비단옷을 입힌 뒤 돈을 매달아 정월 보름날 아침 일찍 길가에 버렸던 생각이 난다. 그때 그 인형을 '제웅'이라 하였다. '추구'(芻狗)는 소용이 있을 때는 이용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버리는 물건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천지는 만물을 마치 추구(芻狗)같이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 눈에는 뭐냐 하면 무정(無情)해 보인단 말이다. <장자(莊子)>에 보면 "불이심손도(不以心損道)하고 불이인조도(不以人助天)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으로 도(道)를 헐지 말고, 인간의 힘으로 하늘을 돕겠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편벽된 마음이라 할까? 사사로운 정 따위로 하늘의 도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하늘을 돕는다고 한 짓인데도 그게 사실은 하늘을 배역(背逆)하는 짓거리가 되는 수가 많다.
예수님이 "이제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사람들한테 죽임을 당할 것이다."하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선생님이 사람들 손에 붙잡혀 처형받으시다니요?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그리로는 가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한 선생님은 그리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면서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때 베드로의 지극히 '인간다운' 행위가 '이심손도'(以心損道)요, '이인조천'(以人助天)이다. 그래서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네가 어째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 하고 무서운 책망을 들었다. 베드로가 바로 '풀강아지'[芻狗]요, 또한 '인간'(人間)들이다.
성인(聖人) 역시 천지(天地)와 마찬가지로 편벽된 마음을 쓰지 않는다. 사사로운 정(情)에 끌어당기지 않고 모든 사람을 공평무사(公平無私)로 대한다. 공평무사로 대하니까 모든 사람을 풀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그러니까 편애하거나 무슨 사적인 기대를 품은 사람들로서는 결국 자기네가 버림받았다고 여기게 된다. 여기서 성인(聖人)이란 천지(天地)의 도(道)를 그대로 쫓아서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즉 천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럼, 성인은 백성을 풀로 만든 강아지처럼 여긴다고 했으니, 백성을 순 개떡처럼 여긴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요즘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가 되겠다 하면서 백성을 개떡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군사 독재자가 그런 따위의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성인이 못 된다. 따라서 똑같이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취급해도 성인의 경우와 성인이 아닌 독재자의 경우는 다르다. 성인의 '추구'(芻狗)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것이고, 독재자의 그것은 불공평유사(不公平有私)한 것이다. 그러니까 태도에 사(私)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다.
다음 "천지지간(天地之間)은 기유탁약호(其猶 橐籥乎)인저 허이불굴(虛而不屈)하고 동이유출(動而愈出)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천지지간(天地之間)은 하늘과 땅 사이를 말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한 말이다. 그러니 바로 우주를 뜻한다. 그 우주가 마치 대장간에서 쓰는 풀무와 같다(其猶橐籥乎)는 말이다. 풀무는 속이 비어 있다. 그러면서 피스톤에 의해 바람을 낸다. 내가 어렸을 때는 대장간을 지나다 풀무질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구조는 아래 그림과 같다.

허이불굴(虛而不屈), 여기 '虛'(허)는 '中'(중)과 같은 뜻이다.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넣어도 한없이 들어가고 꺼내도 한없이 나오는 그런 빔이다. '屈'(굴)은 '굽을 굴'이라 하여 '오므라듦'을 뜻하나 '다할 굴'의 뜻도 있다. 따라서 '허이불굴'(虛而不屈)이라 하면 "텅 비어 있지만 오므라들지 않는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텅 비어 있어서 아무리 해도 다함이 없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자를 따랐다. 텅 비어 있음[虛]은 자신의 뜻을 앞세워 무엇을 사사로이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도(天道)를 쫓아서 무슨 일이든지 하면 다함이 없다. 천도를 따라 하는 것이 바로 '영생'(永生)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이어서 '동이유출'(動而愈出)이라고 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더 뿜어 나온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러니까 작용을 하면 할 수록 더욱 나온다는 말이다.

이 '동이유출'(動而愈出)은 앞의 '허이불굴'(虛而不屈)과 대(對)가 된다. 앞의 '허'(虛)가 무위(無爲)라면 뒤의 '동'(動)은 작위(作爲)가 된다. '유출'(愈出)은 더욱더 나온다는 뜻이니 갈수록 복잡해진다는 말이다. '허이불굴'(虛而不屈)은 뭘 하는 게 없이 다하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일 없이도 자녀를 아무 탈 없이 기르는 '하늘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이유출'(動而愈出)은 온갖 것을 다 하는 것 같은데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고 그러니까 마치 이래라저래라 온갖 잔소리를 다 늘어놓으면서도 자식을 제대로 기르기는커녕 갈수록 반발하게 만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언삭궁(多言數窮)하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고 했다. 여기 '多言'(다언)은 말이 많다는 뜻이고, '數窮'(삭궁)은 자주[數] 막힌다[窮]는 뜻이다. 대개 말이 많을 때는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하면 자연스럽지 못할수록 말이 많게 된다. 그러면 말이 말을 낳고 새끼치고 덧붙이고, 그래서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주 막히니, 그게 바로 여기서 말하는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다. 그러니 차라리 가운데[中]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中'(중)은 자사(子思)가 <중용>(中庸)에서 말한 바로 그 중(中)이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는 그것을 중(中)이라 하고, 드러나되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하지 않고 그 절도[節]에 맞으면 이를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요, 화(和)란 천하에 통달하는 길이다. 마침내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만물은 무럭무럭 자란다(喜怒哀樂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바로 이 중(中)이 여기 늙은이가 말씀하시는 '수중'(守中)의 중(中)과 같은 것이다.
<도덕경(道德經)>의 말로 바꾸면, 중(中)은 '도'(道)가 되고, '화'(和)는 '덕'(德)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을 지킨다'[守中]는 말은 천하의 큰 뿌리를 지킨다[天下之大本]라는 말이 되고, 그것을 달리 말해 하느님을 모신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예컨데 강의 초청을 받고 어디 가서 강의할 때 내 딴에는 아주 잘하겠다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 사람 앞에 서면 오히려 생각처럼 강의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꾸밈없이 강의하면 오히려 잘 되는 경우가 있다. 작위(作爲)가 바탕에 깔린 말은 하면 할수록 막히게 된다. 그러니 여기서 중(中)을 지키란 말은 차라리 언표(言表)를 하지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수중(守中)을 하면 따로 언표가 필요 없다.
중(中)을 지킨다는 말은 하느님을, 부처님을 모신다는 말인데, 이런 사람이 볼 것 같으면 중(中)을 모신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분을 모신 거로 보인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부처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돼지다. 다만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하느님을,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몸으로 안다고 했을 때,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면 무슨 말이고 편벽된 마음으로 할 리 없고, 자연 말이 많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른바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할 수 있다. 말 없는 가르침! 이것이야말로 진짜 가르침이다. 요즘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말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한송 게송>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힙니다. 하늘과 땅은 치우친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깁니다.
하늘과 땅 사이
그건, 풀무와 같아서
속이 텅 비어 있으면서도 쭈그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뿜습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힙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2026. 02. 16. 설 전날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늙은이가 <노자> 제5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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