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6장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   도는 신비의 여인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읽기> 곡신(谷神)은 불사(不死)니, 시위현빈(是謂玄牝)이니라. 현빈지문(玄牝之門)을 시위천지근(是謂天地根)이라 하느니라. 면면(綿綿)이 약존(若存)하니 용지불근(用之不根)이니라. <풀이>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을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서 항상 존재하는 것 같으니 아무리 써도 힘겹지 않다. <한송 강해> 여기서는 도(道)를 '골짜기의 신'[谷神]으로 비유하고 있다. 골짜기는 비어 있음으로써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고, 수용하면서도 또한 소유하지 않는다. 유형한 골짜기의 무형한 빈 허공에서 신비로움이 나온다. 이것이 '골짜기의 신'[谷神]이다. 즉 곡신(谷神)은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이 하나가 되어 영원한 것이다.  늙은이는 이러한 '골짜기의 신비로움'을 유형과 무형을 합친 불사(不死)의 오묘한 신비, 생산적 기능의 상징으로서의 '현묘한 암컷'[玄牝]이라 묘사했다. '牝'(빈)은 수컷인 '牡'(모)에 상대(相對)되는 말로 암컷을 말하지만, 모든 암컷 중에서 여인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도(道)는 여인(女人)이라 할 수 있고, 여인 중에서도 '신비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여인, 생산적 기능의 상징으로서의 여인. 이런 점에서 계곡과 여인은 여러 가지로 공통되는 점이 많다. 계곡을, 특히 폭포라도 떨어지는 계곡을 보고 있으면 여인을 보는 듯하다. 자기를 낮은 곳에 두고, 허허하고, 고요하고, 탁 트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생산한다는 면에서 여인과 계곡은 서로 닮았다.  김형효는 이 곡신(谷神)을 불가(佛家)의 아리아식(Alayvijnana), 프라톤...

<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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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 <노자>  제5장 만물을 풀강아지 처럼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읽기>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여 이만물(以萬物)로 위추구(爲芻狗)하니라. 성인(聖人)은 불인(不仁)하여 이백성(以百姓)으로 위추구(爲芻狗)니라. 천지지간(天地之間)은 기유탁약호(其猶橐籥乎)인저 허이불굴(虛而不屈)하고, 동이유출(動而流出)이라. 다언삭궁(多言數窮)하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 <풀이> 하늘과 땅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만물을 풀강아지 처럼 여긴다. 성인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속이 텅 비어 있으면서 쭈그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뿜는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한송 강해> 天地不仁(천지불인), 여기서 '仁'(인)은 사적인 감정으로 애정(愛情)을 말한다. 원래 이 '仁'은 공자(孔子)의 주체사상으로 유가(儒家)를 상징하는 개념어(槪念語)이다. 그런데 늙은이는 '不仁'(불인)이라 하여 '仁'(인)에 대한 반어(反語)로 사용했다. 그러니까 "인(仁)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그렇다는 말인가? 천지(天地), 하늘과 땅이 그렇단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인정(仁情)머리가 없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다. 하늘과 땅이 인정머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는데 가려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편애라고 할까, 아니면 마음이 끌리는 애착이랄까 하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만물을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대한다는 말이다.  천지는 인간이 바라는 기대나 희망이나 믿음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그러한 생명체다. 천지에게 무엇인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에서 보면 천지는 야속하고 잔인한...

<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4장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 <노자>  제4장  도는 그 쓰임새가 큽니다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읽기> 도충이용지(道沖而用之)하니 혹불영(或不盈)이라. 연혜(淵兮)여, 사만물지종(似萬物之宗)이로다. 좌기예(挫其銳)하여 해기분(解其紛)하고 화기광(和其光)하여 동기진(同其塵)하느니라. 잠혜(湛兮)여, 사혹존(似或存)이니라. 오부지수지자(吾不知誰之子)인데 상제지선(象帝之先)이니라. <풀이> 도(道)는 그릇처럼 비어 있어 그 쓰임에 늘 차고 넘치는 일이 없다. 연못처럼 깊음이여! 만물의 근원 같구나.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엉클어진 것을 풀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먼지와 하나가 된다. 깊고 고요함이여! 뭔가 늘 존재하는 것 같구나.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 줄 알 수 없지만, 하느님보다 먼저 인 것 같이 보인다. <한송 강해> '沖'(충)은 '盅'(충)자 대신 쓴 글자로 빈 그릇을 뜻한다. '或'(혹)은 '항상', '늘', '언제나'로 해석한다.  따라서 "도충이용지(道沖而用之)하니 혹불용(或不用)이라"한 것은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이 비어서 아무리 퍼 담아도 차고 넘치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 쓰임새가 크다는 뜻이다. 여기서 '비어 있다'는 것은 없음의 '無'(무)와도 같은 것 같지만, 이는 현상계에서 말하는 '있다, 없다' 할 때 쓰는 상대적 의미의 '무'가 아니라 현상과 절대를 모두 포함한 '무'이다. 그러니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공'(空)과 같은 개념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한 것으로 채워도 또 비고 채워도 또 ...

<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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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  무위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貴,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읽기> 불상현(不尙賢)하여 사민부쟁(使民不爭)하고, 불귀난득지화(不貴難得之貨)하여 사민불위도(使民不爲盜)하며, 불현가욕(不見可欲)하여 사심불란(使心不亂)하라. 시이(是以)로 성인지치(聖人之治)는 허기심(虛其心)하고, 실기복(實其腹)하며, 약기지(弱其志)하고, 강기골(强其骨)하며, 상사민무지무욕(常使民無知無欲)하고, 사부지자불감위야(使夫知者不敢爲也)니라. 위무위즉 무불치(爲無爲則無不治)니라.  <풀이> 잘난 사람을 떠받들지 않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고, 얻기 힘든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질하지 않게 하며, 욕심낼만한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이로써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하며, 언제나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바가 따로 없어 욕심이 없게 하고, 무릇 안다는 자로 하여금 감히 나서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위로써 하면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다. <한송 강해> 이 장은 통치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앞의  <노자> 2장이 원론에 해당한다면 이 3장은 각론이라 할 수 있다.  여기 '尙'(상)은 높이 받든다는 뜻이고, '賢'(현)은 원래 '어질 현' 자이지만 여기서는 '잘난 사람', '재주 있는 사람', ''뛰어난 사람' 따위로 보는 것이 좋겠다. 재주가 있어 뛰어난 사람을 떠받들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좀 잘 났다고 해서 뛰어난 사람을 떠받들어 상을 주거나 특별대우를 하면, 너나없이 상을 받으려고 다투기 때문이다...

<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2장

-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惟不居, 是以不去. (풀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것이 아름답다고 알아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것이 더러움이요, 이것이 선하다고 알아 선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선하지 아니함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말미암아 있고 없으며,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말미암아 쉽고 어려우며, 길고 짧음은 서로 말미암아 길고 짧으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말미암아 높고 낮으며, 내는 소리[音]와 들리는 소리[聲]는 서로 말미암아 나고 들리며, 앞과 뒤는 서로 말미암아 앞서고 뒤선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일을 무위로써 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베풀며 만물을 이루어 내되 그 가운데 어떤 것을 가려내어 물리치지 않으며 낳고는 그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하고는 그 한 것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한송 강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물이나 사건(행위)을 평할 때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저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미(美)와 오(惡)를 가려서 한쪽만을 고집하고 마찬가지로 이것은 착한 것[善]이고 저것은 착하지 않은 것[不善]이라고 선(善)과 불선(不善)을 가려서 한쪽을 고집하는데, 그것이 바로 더러움[惡]이요 착하지 못한 일[不善]이다. 이것은 늙은이가 모든 것을 분별지(分別智)에 걸려서 보면 안 된다고 경계하신 말씀이다.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은 서로 다른 별개의 둘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 하나다. 서로 모순이면서 통일을 이룬다. 착한 것이 있으니까 착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 더러운 것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상반상성(相反相成)'이라 한다. '모순...

<여안당 고전강독> 노자 제1장

-한송 정우열 교수의 <늙은이 이야기>-  <노자>  제1장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진짜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한송 강해> 늙은이는 도(道)라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하면서 "'도'(道)를 '도'라고 말하면 그러한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도라고 이름 붙이면 그건 이미 도가 아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형체가 있어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도는 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고 했던가?!  옛날에 초(楚)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다가 잘못하여 칼이 물속에 빠지자, 그 뱃전에 표를 하였다가 배가 나루에 닿은 뒤에 표를 해놓은 뱃전 밑의 물속에 다시 들어가 칼을 찾는다는 고사(故事)다. 그렇다. 뱃전에 '도'라고 표시해 놓으면 이미 땅 밑에 '도'는 배의 '도'와 멀리 떨어져 버려 표시한 '도'에는 '도'가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는 것은 뱃전에 표시하고 그곳에서 '도'를 찾으려는 것과 같다. '도'는 이렇다 저렇다 말로써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는 안다 모른다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 뭐라고 표현해야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런 차원에 속한 게 아니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또한 같은 맥락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 긍정이 있을 때, 그러니까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이름은 항상 그 이름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긍정에 대한 부정으로 얘기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무엇...